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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한 책이라면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당연히 어떠한 오류나 모순도 없는 진리일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를 신앙하던 글쓴이의 눈에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성경의 내용들이 대부분 모순과 오류 투성이었고, 그러한 궁금증에 대해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진리란 무엇인가?
글쓴이는 특정 종교를 신앙하는 종교인은 아니다. 다만 창조주의 존재를 확신하며 신의 참된 메시지를 깨우치고자 나름대로 여러 분야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이렇게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깨우침을 갈망하게 된 계기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기독교를 떠난 후의 일이다.
그 당시 글쓴이의 가장 큰 궁금증은 예수가 있는지도 몰랐거나 알았어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다른 신을 믿으며 평생 선하게 산 사람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지옥에 가는 형벌을 받는다는 공갈이었다.
더욱 믿기지 않는 것은 평생 강도, 강간, 살인을 일삼다 생을 마감하는 흉악범도 죽기 직전에 예수를 믿으면 용서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읽어봐도 이렇게 해석할만한 구절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가르침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이 가르치는 하나님 말씀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리인가?
그것은 조금만 성경을 꼼꼼히 읽어보면 잘못 기록된 내용은 물론이고, 같은 내용의 가르침을 상반되게 기록했거나 동일한 사건 기록이 성경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것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대부분 예언이나 비유, 환상 등 묵시문학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어 꿈의 언어를 모르면 절대로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담긴 진리의 뜻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묵시문학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 즉, 꿈을 해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결국 기독교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독학으로 신학을 배우면서부터다. 그제서야 분명하게 그들의 거짓된 교리를 낱낱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꿈의 해석법 덕분이었다.
꿈의 해석법으로 성경에 기록된 예언서와 예수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해석한 결과는 실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모순과 난해한 구절들이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로 모순되고 이치에 어긋나게 보였던 모든 것들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 창조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실상은 어떠한가? 그들이 진정 마음속으로 창조주의 존재를 믿기나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모든 종교집단 중에서 기독교가 가장 많은 종파로 분열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오늘날 가장 큰 종교집단을 이루고 있는 기독교의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의 진리와 근본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분파를 만들고 서로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행태인 것이다.
원죄론의 허구성
현재 대다수 기독교 종파에서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가르치고 믿고 있는 대표적인 교리는 원죄론과 삼위일체 그리고 구원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리는 모두 먼저 교리를 만들어 놓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 구절에서 유리한 부분만 발췌하여 아전인수식으로 억지로 해석해 짜깁기한 것이다.
감히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각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갖다 붙인 성경 구절이 얼마나 모순되고, 억지 주장인지 모두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요지는 절대 특정 종교를 비방하거나 폄훼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구실로 잘못된 교리를 맹신하게 하면 결국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영적인 죽음의 길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을 뿐이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기독교의 존재 근거라 할 수 있는 원죄론과 구원론이 얼마나 허구적인 교리인지 성경을 통해 알아보면 이렇다.
원죄론의 근거가 되는 창세기 3장의 내용과 구원론의 개요는 이렇다.
인류의 조상이 되는 아담이 뱀의 꾐에 속아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죄를 짓게 된다.
그로 인해 영생할 수 있었던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그 죄가 후손 대대로 유전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죄를 속죄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었으며 이것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핵심 교리가 마찬가지지만 원죄론 또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가르친 진리가 아니라, 종교적인 목적에 의해 억지로 성경 구절을 꿰어 맞춘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이 심하고 구성도 매우 엉성하며 모순투성이다.
원죄론의 근거
원죄론의 근거가 되는 아담의 창조에 대해 살펴보자.
창세기에는 두 가지의 창조 이야기가 등장한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창세기 1장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는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를 잠자게 한 후 갈빗대를 빼내어 여자를 창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창세기 2장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과연 어떤 기록이 진실일까?
성경이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분명 다른 의미를 담아 비유적인 표현으로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창세기 1장에서 4장까지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실제로 창조주가 자연계를 창조하는 내용이 아니다.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창조 신화를 재료로 삼아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역사하는 시작과 마지막에 관한 과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기록한 것이다.
꿈의 해석법에 따르면 아담의 창조가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지금의 성경을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고, 여자를 창조하는 과정은 성전 곧 지금의 교회가 설립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했을 때 2장에서의 창조 이야기는 아담(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먼저 만들고, 그의 갈빗대를 빼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의 계명을 택해) 여자(성전 곧 교회를 상징)를 만든 것을 천지창조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1장에서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 종교의 마지막 때인 오늘날의 종교적 상황을 천지창조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때는 이미 온 세상에 성경과 교회가 가득 차 있지만 모두 타락하고 부패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새롭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새로운 성경)와 여자(새로운 교회)를 동시에 창조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한 남자와 여자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 창조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것이며 인간의 창조와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오류는 아니며 꿈의 해석법을 모르고 잘못 해석한 난센스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 기존의 교리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이것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리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담이 따 먹을 줄 뻔히 알면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어 놓을 리가 있겠는가?
창세기 2장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리고 그걸 따먹었다고 영원히 죄를 유전시키고, 예수를 속죄양으로 죽게 하고 그를 믿어야만 용서하고 구원해준다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있는지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아야 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죄론의 근본이 되는 아담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창세기 3장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장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만약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절대로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원죄론은 원인 무효일 수밖에 없다.
창세기를 꼼꼼하게 정독해 보면 알겠지만 아담이 창조된 것으로 표현한 시기에는 이미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전제로 기록했음이 분명하다.
창세기 4장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지구상에 첫 인간인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가인과 아벨 형제 이렇게 네 사람밖에 없을 때, 가인이 동생 아벨을 때려죽이고 집을 떠나 유랑하는 신세가 된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정착하여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내용도 있다. 과연 이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원죄론을 만들어야만 했던 동기를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초기 기독교 전도 과정에서 예수만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는데 일단 구원받은 자들이 또다시 죄를 지었을 때 이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 즉, 원죄가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인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2. 기독교 초기에 다양한 신을 믿던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도 근본적으로 악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숭배하는 신도 착하게 살면 구원해 주고 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전도를 하려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원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3. 종교 조직을 유지하고 종교지도자들의 기득권과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신자들을 통제할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지금까지 지은 죄는 물론이고, 앞으로 지을 죄까지 모두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하면 더 이상 교회에 나갈 필요가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종교조직과 종교지도자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원죄가 있다고 하면 교회에 계속 나가서 속죄를 해야 하고, 원죄를 깨우치고 잘 가르쳐줄 종교지도자들이 계속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위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교리는 신도들을 맹신의 우물 속에 가두고 진리를 질식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인간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한 교리에는 진리와 생명이 없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눈먼 종교인을 양산할 수는 있어도 결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종교의 타락이 극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교리에 맹종 맹신하지 말고, 할 수만 있다면 하루빨리 관념의 포로에서 벗어나 진리에 눈을 뜨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