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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고 나면 대부분 쉽게 잊어버린다. 꿈을 잘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술이나 마약 등에 취해 두뇌 활동이 건전하지 못한 사람, 지나친 정신활동으로 피로가 누적된 사람이다.
또한 육체노동이 격심하여 쉽게 깊은 잠에 빠지게 됨으로써 반수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사람, 한 가지 일에만 골몰해 있고 별다른 소원이나 근심이 없는 사람, 언제나 잠이 부족한 사람, 또는 꿈에 관해 관심이 없는 사람 등이다.
신령이 등장하는 꿈
꿈속에 등장하는 신령이나 영혼의 표상은 실존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의식이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상이다.
우주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절대자로서의 조물주, 즉 하느님의 존재를 가정한다 하여도 그것은 단지 우리의 또 다른 자아가 분장을 하고 꿈의 암시에 기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각성 시 신이나 기타 신앙의 대상에 간절하게 기원을 하면 반수 상태에서 꿈으로 어떤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이때 꿈속에 나타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실존이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앙인이라면 신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하면 실생활에서 즐거움과 만족, 그리고 복된 일을 체험할 수 있고, 반대로 악을 행하면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벗어던질 수 없다.
악을 행함으로써 자멸로 이끌려 가는 것은 신이 벌을 내려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이 스스로 저주하고 심판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잠재의식의 무한한 능력 중의 하나인 것이다.
꿈속에서 하느님이 상징하는 것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간에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가장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절대권자란 하느님이다. 상제 · 상천 · 천제 등으로 불리며, 가톨릭에서는 하느님, 천주(天主) 또는 성부(聖父)라 칭하기도 하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 칭한다.
하느님의 실체를 본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간혹 하느님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전지전능의 유일신인 하느님은 아니다.
우리의 잠재의식이 만들어 낸 심상,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의 또 다른 자아가 가면을 쓰고 하느님이라는 관념적 형상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꿈속에서 행동하는 하느님, 죄를 단죄하는 하느님, 예언이나 계시하는 하느님 등은 모두 자기 암시적 표현으로 양심 · 우주 · 진리 등의 관념과 결부된 일이나 사건을 예시하는 상징 표상이다.
또한 꿈속의 하느님은 다른 사람의 동일시도 가능한데, 구원이나 간구의 대상인 군주나 부모 또는 은인 등을 나타낼 수도 있다.
꿈과 환상으로 이루어지는 예언
예언은 꿈과 이상 그리고 환상의 형태로 꿈꾸는 자의 잠재의식을 통해 나타난다. 그 명칭과 경험하는 동기는 다를지라도 형성 원리와 표현 수단 및 상징으로 의도하는 바는 동일하다.
또한, 이상이라고 하는 것도 꿈과 환상 가운데서 좀처럼 해석하기 힘든 것 즉 현실적인 일과는 거리가 먼 표현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꿈은 보편적으로 수면 중에 형성되지만 환상은 순간적으로 환각 상태에 빠지거나 무의식 상태 또는 최면 상태같이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입면 상태이거나 잠에서 깰 무렵인 이면 상태 등에서 형성되고 경험하게 되며 주로 시각적 현상의 어떤 환영을 보는 것이 보통이다.
예언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 주로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까닭은 본질적인 내용을 압축하고 생략해서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잠재의식에 강하게 인식시킬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꿈으로 대화한다
꿈의 모든 표현 양식은 현실적인 경험의 재현이 아니라 본질적인 사고 내용의 낱낱의 언어를 상징적인 표상물로 바꿔놓는 것이다.
꿈이 어떤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든 간에 의식적인 사고가 중단되고 잠재의식적 사고로 그 활동이 넘어가지 않으면 꿈은 형성되지 않는다.
인간의 잠재의식적 기능은 신성에 가까운 것으로써 이를 통해 신과 교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미해결의 관심사와 미래사를 판단하고 예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만한 능력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한다면 그 꿈과 환상적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이 되고 그것이 바로 선지자나 사도들의 예언이 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만약 성경의 예언이 꿈으로 오지 않고 구전이나 선지자들의 영감에 의해서 전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것이 아니므로 그 예언의 진실성과 실재하신 하나님을 증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성경은 꿈으로 해석해야 한다. 꿈의 해석법을 알아야 성경의 비유의 뜻을 알 수 있다. 결국 꿈의 해석법을 모르면 성경을 비롯한 모든 묵시적인 예언을 바르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대개의 성경 연구가들은 꿈의 독특한 상징 언어의 참뜻을 알지 못하므로 직관적인 해석법을 적용하고 있으며 꿈으로 기록된 문장 전체의 언어가 상징적이며 암호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으로 부분적인 해석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부분은 맞는 것 같으나 다른 부분과 서로 맞지 않는 모순에 빠져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이제는 꿈의 완전한 해석법이 나와 전체적인 대의적 경향을 파악할 수 있음으로써 구절구절의 부분적 해석을 내렸더라도 그것을 꿈 전체의 의미로써 연결하고 종합하여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종교집단의 지배자들은 아무리 완전한 해석법에 의해 올바른 해석을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단으로 단죄하고 배척하는 것이 현실이며 그들에게 세뇌당한 신도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단자로 몰려 무자비한 살육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쌓은 그들의 모든 부귀영화와 명예도 결국 마지막 때가 되면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으니 놀랍지 않은가?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마지막 때가 된 줄 깨달으라 했다.
다니엘이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 즉 적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보수적인 기독교 집단을 말하는 것이며,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거룩한 성도들과 맞선다는 뜻이다.
누구도 바른 말을 할 수 없으며 진리를 말한 자는 즉시 이단으로 몰려 그 집단으로부터 내쫓기는 지금이 바로 마지막 때인 것이다.